디지털 뇌 복제와 5억 년 버튼: 정체성의 철학·과학적 분석
발단: 5억 년 버튼의 정체성 딜레마

(5억년 버튼 > 오피니언 | 토론토 중앙일보)일본의 단편 만화 「5억년 버튼」에는 이런 가정이 등장한다. 눈앞의 버튼을 누르면 의식은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서 5억 년을 보내게 된다. 시간이 끝나면 그동안의 기억은 지워지고, 의식은 원래 세계의 버튼을 누른 순간으로 돌아온다 (보상으로 거액의 돈이 주어진다). 겉보기에 결과는 즉각 돈을 얻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오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그 5억 년의 고독한 경험은 분명 누군가(바로 “나”)가 겪었다는 점에서 심각한 정체성 문제를 제기한다. 버튼을 누른 후 돌아온 존재가 과연 ‘예전의 나’와 동일한지에 대한 의문은 철학적, 신경과학적, 정보이론적, 기술적 관점에서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5억년 버튼 > 오피니언 | 토론토 중앙일보). 아래에서는 이 딜레마를 다각도로 분석한다.
1. 전통적 개인 정체성 이론과 “나”의 기준
개인이 시간에 걸쳐 동일한 “나”로 남는 기준에 대해, 전통 철학에는 여러 이론이 있다:
- 기억 이론 (존 로크): 개인 정체성의 핵심을 기억과 의식의 연속성에서 찾는다. 로크는 “어떤 시점의 사람이 이전 시점의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기억할 수 있느냐”를 동일성 판단 기준으로 제시했다 (Personal identity – Wikipedia) ( John Locke on Personal Identity – PMC ). 즉 “개인의 동일성은 실체가 아니라 의식의 동일성에 있다”고 보았다 (Personal identity – Wikipedia). 기억 이론에 따르면 5억 년 동안의 경험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 경험은 현재의 ‘나’와 심리적 연속성이 단절된 것이다. 기억이 없으므로, 로크의 관점에서는 그 고통을 겪은 존재는 현재의 내가 아닐 수도 있다. (실제로 철학자 토마스 리드 등은 “어떤 사람이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해도 그 사람이 여전히 그 자신이라는 직관”을 들어 로크를 비판하기도 했다.)
- 심리적 연속성 이론 (데릭 파핏 등): 기억뿐 아니라 성격, 신념, 욕구 등 정신 상태의 연속적인 유사성을 동일성의 조건으로 본다 (마음 업로딩: 디지털 영생의 꿈 – 고등과학원 HORIZON).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와 직접적으로 기억이 이어지지 않더라도, 중간 단계들의 연쇄를 통해 심리 상태가 이어지면 동일인으로 간주한다. 파핏은 순간순간의 ‘나’들이 겹쳐지는 심리적 연속성(Relations R)의 강도에 따라 동일성을 논했고, 완벽한 연속성이 없더라도 충분한 심리적 연결이 있다면 사실상 동일인으로 볼 수 있다고 보았다 (마음 업로딩: 디지털 영생의 꿈 – 고등과학원 HORIZON). 그러나 그는 이러한 연속성이 두 갈래로 가지는 경우(예: 뇌 복제나 분할)에 전통적 의미의 “한 사람”이라는 동일성 개념이 무의미해질 수도 있음을 지적했다. 파핏의 결론은 “동일성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고 심리적 연속성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입장에선 5억 년을 겪은 후 기억이 지워진 존재는, 심리적 영향이 일절 남지 않았다면 현재의 나와 연속성이 없으므로 동일인이라 보기 어렵다. 다만, 파핏은 이런 경우에도 엄격한 숫자적 동일성(numerical identity)은 끊기지만, 만약 기억을 지우지 않고 남겼다면 (혹은 간접적으로 영향이 남았다면) 심리적 연속성이 유지되어 같은 사람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을 것이다 (uploading) (uploading).
- 실체 이론 (신체/영혼 동일성): 기억이나 심리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어떤 “실체”(substance)가 동일성을 부여한다는 관점이다. 한 예로 영혼 불변설은 “동일한 영혼(spirit)이 계속 존재하면 그 사람이 동일하다”고 본다 (Personal identity – Wikipedia) (Personal identity – Wikipedia). 또는 현대 철학의 생물학적 동일성 이론(Animalism)은 “동일한 생물학적 생명체(특히 뇌나 신체)가 유지되면 동일인”이라는 입장이다 (Uploading and Branching Identity | Minds and Machines ). 실체 이론에 따르면, 비록 기억이 사라졌어도 불변의 실체(예컨대 영혼)가 이어지거나, 같은 뇌 구조가 연속해서 작동했다면 그 경험을 한 존재와 돌아온 존재는 동일한 “나”일 수 있다. 영혼설을 취하면 5억 년 동안 고통받은 것도 결국 나의 영혼이고, 기억이 지워져도 영혼이 같다면 나 자신이 겪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 신체 동일성을 강조하는 견해에서는, 만약 뇌를 디지털로 전환한 시점에서 더 이상 원래의 생물학적 뇌가 아니게 된다면 이미 동일성이 깨졌다고 볼 수도 있다. (예: 철학자 올슨(E. Olson)의 동물주의는 인간 유기체의 지속성을 정체성 조건으로 삼아, 뇌를 스캔해 컴퓨터에 올리면 같은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므로 동일인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Uploading and Branching Identity | Minds and Machines ).)
요약하면, 기억/심리적 연속성이론에서는 5억 년의 기억 단절로 인해 동일성이 문제시되고, 실체 기반 이론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끊기지 않는 실체가 존재한다면 동일성이 유지될 수 있다고 본다. 이처럼 전통 이론마다 답이 다르기에, “디지털로 복제된 뇌가 겪은 망각된 5억 년”에 대한 평가는 이론에 따라 찬반이 갈린다.
2. 뇌과학으로 본 기억·자아·의식의 기반
신경과학적 관점에서 개인의 자아(identity)는 뇌의 물질적 과정으로 이해된다.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핵심 정체성을 붙잡아주는 접착제는 기억”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결과가 많다 (How Our Brain Preserves Our Sense of Self | Scientific American). 경험을 쌓을 때마다 뇌세포 간 연결(시냅스)이 재구성되고, 이 신경 연결망의 변화가 기억 형성과 함께 우리의 자아감을 형성한다 (How Our Brain Preserves Our Sense of Self | Scientific American). 특히 뇌의 해마(海馬)는 에피소드 기억을 저장하는 관문이고, 전전두엽 피질(vmPFC)은 과거-현재-미래의 자기 모습을 통합하여 자기 서사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고 보고되었다 (How Our Brain Preserves Our Sense of Self | Scientific American) (How Our Brain Preserves Our Sense of Self | Scientific American). 한 연구에서 vmPFC에 손상을 입은 환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일관된 이야기, 즉 정체성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는 이 부위가 뇌 속 “자아 모델”의 핵심임을 시사한다 (How Our Brain Preserves Our Sense of Self | Scientific American).
의식(Consciousness) 역시 뇌의 특정 활동 패턴과 관련된다. 예를 들어 통합 정보 이론(IIT)은 뇌가 통합된 정보를 처리할 때 고유한 의식이 발생한다고 하며, 글로벌 워크스페이스 이론(GWT)은 전두엽-두정엽 네트워크의 광범위한 활성화가 의식적 각성 상태를 만든다고 본다. 이러한 현대 의식 이론들은 공통적으로, 의식은 뇌의 정보처리 패턴에 달려있음을 강조한다. 즉 충분히 정밀한 뇌 시뮬레이션에서는 이와 동일한 패턴이 재현되어 의식 상태도 재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Mind uploading – Wikipedia). 실제로 “마음 업로딩(mind uploading)”을 지지하는 과학자들은 인간의 뇌를 컴퓨터 상에 그대로 에뮬레이션하면 그 프로그램도 인간처럼 감각하고 의식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Mind uploading – Wikipedia).
신경과학은 또한 “기억이 없는 경험”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예컨대, 중증의 레트로그레이드(역행성) 기억상실 환자를 보면, 이전에 겪은 일의 기억을 몽땅 잃어버려도 그 사람이 성격 특성이나 습관 등 일부 정체성 요소는 유지한다. 뇌 속에는 절차 기억이나 정서적 기억처럼 의식적 회상과 무관하게 남는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5억 년의 고독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무의식적인 뇌 변화가 누적되었다면 현재의 나에게 어떤 흔적(예: 막연한 공포감이나 성격 변화)을 남길 가능성도 있다. 다만 원작 시나리오에서는 “기억이 완전히 지워지고, 정신과 육체도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고 하여 뇌 상태까지 초기화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5억년 버튼 > 오피니언 | 토론토 중앙일보). 만약 뇌의 시냅스 변화마저 되돌아간다면, 신경과학적으로는 그 5억 년 동안 형성된 새로운 기억 흔적이 모두 소거된 것이므로, 현재의 뇌에는 물리적 연속성은 있으나 정보 연속성은 단절된 셈이다. 요컨대 뇌과학은 “정체성 = 뇌의 정보 연결”임을 보여주며, 정보가 완전히 소거된 경우 동일성 유지가 어렵다는 쪽에 힘을 싣는다.
한편, 분열된 뇌에 대한 사례들은 한 몸에 두 개의 자아가 존재할 가능성까지 시사한다. 뇌량을 절제한 분할뇌(split-brain) 환자의 좌우 뇌반구는 서로 다른 의사결정을 내리는 등, 한 사람 내 두 의식체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이는 뇌의 정보 통합이 깨지면 일관된 하나의 ‘나’라는 감각도 흔들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5억 년 버튼 시나리오에서, 디지털 복제로 생성된 나와 원래 내가 분기되어 별개 경험을 쌓는 상황도 이와 유사하게 생각해볼 수 있다. 신경과학적으로 “하나의 자아”란 결국 뇌의 통합된 정보처리 체계 범위를 가리키며, 만약 한 개인의 뇌가 복제되어 둘 이상의 정보처리 흐름이 생기면, 각각 독립된 자아가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uploading). (바로 이 점이 다음 논의인 디지털 전뇌화에서의 정체성 문제로 이어진다.)
3. 뇌의 디지털 복제(전뇌화)와 정체성 개념의 변화
전뇌화(WBE, Whole Brain Emulation)란 인간의 뇌 구조와 기능을 정보로 스캔하여 컴퓨터상에 재현하는 기술을 말한다 (Uploading and Branching Identity | Minds and Machines ). 이는 곧 뇌의 모든 뉴런과 시냅스 연결 정보를 데이터화한다는 뜻이며, 철학적으로 “인간을 정보 패턴으로 환원”하는 작업이다. 디지털로 뇌가 복제되면 정체성 개념에 몇 가지 혁신적 변화가 일어난다:
- 연속성 vs. 불연속성: 기존에는 한 사람의 정체성은 하나의 연속적 존재로 간주됐다. 그러나 업로딩 기술이 생기면, 동일한 정보 패턴을 가진 복제가 만들어질 수 있다. 예컨대 “Bio-홍길동”의 뇌를 스캔해 “Digi-홍길동”이라는 디지털 사본이 생기면, 이 둘은 초기에는 기억과 성격이 똑같은 질적으로 동일한 두 인격체다. 하지만 숫자적으로는 분명 두 개의 개체이며, 이후 각자 별개 경험을 쌓아 곧 달라진다. 이 경우 “어느 쪽이 진짜 홍길동인가?”라는 질문에 전통 개념으론 답하기 어렵다 (uploading). 최근 철학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위해 정체성 개념을 재검토하고 있는데, 일부는 “분기하는 정체성”(branching identity) 개념을 도입하기도 한다 (Uploading and Branching Identity | Minds and Machines ) (Uploading and Branching Identity | Minds and Machines ). 이는 하나의 원본 자아로부터 둘 이상의 분신이 나뉘어 나가도 각각 원본과 심리적 연속성을 지니므로, 복수의 “나”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파격적 주장이다. 전통적으로 개인 동일성은 배타적(unique)이라고 여겼지만, 전뇌화 시대에는 동일성의 단일성 원리가 깨질 수 있다는 것이다 (Uploading and Branching Identity | Minds and Machines ) (Uploading and Branching Identity | Minds and Machines ). 물론 이에 반대하는 견해도 강력하다. 다수 철학자들은 숫자적 동일성(numerical identity)은 한 명에게 하나만 해당되는 개념이기에, 분기한 복제들 중 오직 하나만이 원래의 ‘진짜’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는 “가장 가까운 연속자(closest continuer)” 이론을 통해, 복제본들 중 원본과 인과적으로 가장 연속된 쪽만 동일인으로 간주하거나 법적으로 동일한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Uploading and Branching Identity | Minds and Machines ). 예컨대 비파괴적 업로딩(원본 뇌를 파괴하지 않고 스캔)으로 두 개가 생겼다면, 살아남아 있는 생물학적 뇌 쪽을 진짜로 보고, 디지털 복제를 별개 인격체로 취급하는 식이다 (uploading). 반대로 파괴적 업로딩(뇌를 스캔하며 원본을 파괴)의 경우, 디지털 복제가 원본의 유일한 연속자이므로 동일인으로 인정하자는 입장도 있다 (uploading) (uploading). 이처럼 업로딩 방식(원본 보존 여부)에 따라 정체성을 다르게 판단해야 한다는 논의도 진행 중이다.
- 패턴 동등성 vs. 존재론적 동일성: 뇌를 정보 패턴으로 볼 때, 동일한 패턴이 어느 매체에 존재하든 똑같은 인격 특성을 보일 수 있다. 이를 두고 일부 미래학자들은 “정체성은 패턴 그 자체”라는 정보이론적 정체성을 설파한다. 이러한 패턴 동일성 이론에 따르면, 설령 내 뇌의 물질적 구성 요소가 싹 바뀌어도 (혹은 아날로그 뇌가 디지털로 바뀌어도) 정보 구조만 유지되면 나는 계속 나인 것이다 (Uploading and Branching Identity | Minds and Machines ). 실제로 뇌과학 분야에서도 “정보이론적 사망”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는 뇌의 정보 패턴이 완전히 소실되어 복구 불가능해지는 시점을 진정한 죽음으로 정의한다 (Information-theoretic death – Wikipedia). 이 관점에서 보면, 5억 년 버튼 시나리오에서 비록 매체가 뇌에서 컴퓨터로 바뀌었어도 그 안에서 동일한 정보처리 패턴(나의 인격과 기억)이 흐르고 있었다면, 적어도 그 5억 년 동안은 나의 존재가 연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정보 패턴이 같다고 해서 1인칭 존재론적 동일성까지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반론이 있다 (uploading). 철학자 데이비드 채머스는 “나와 동일한 구조와 상태를 가진 쌍둥이가 있다 해도, 그 쌍둥이는 질적으로 나와 똑같을 뿐 내 자신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uploading). 결국 “정보=나”라는 주장은 동일성을 질적 유사성으로 치환한 것에 불과하며, 진짜 나인지 여부는 여전히 인과적 연속성에 달렸다는 것이다. 이 논쟁은 5억 년 버튼의 핵심 질문과 직결된다: 디지털 복제로 동일한 패턴의 의식이 5억 년을 살아도, 마지막에 원래 상태로 되돌린다면 그 패턴의 연속성은 끊긴다. 그렇다면 정보 패턴의 관점에서도 최종적으로는 동일성이 단절된 셈이다. 요컨대, 전뇌화를 통해 정체성을 정보 패턴으로 파악하는 사고방식이 등장했지만, 패턴의 복제·소멸이 자유로운 디지털 환경에서는 기존의 “한 사람의 연속성” 개념이 크게 흔들리게 된다.
- 자아의 저장·편집 가능성: 뇌를 디지털 데이터로 다루면, 이론적으로 백업, 편집, 재설치가 가능해진다. 이는 정체성을 한층 복잡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디지털 백업된 자아를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해 둔다면, 사고로 육체가 죽더라도 그 시점의 백업을 불러와 의식을 재가동할 수 있다. 이런 디지털 영생 시나리오에서 “부활한 나”는 이전의 나와 기억과 성격이 연속적이므로 본인은 계속 삶을 이어가는 느낌일 수 있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보면 한 번 죽은 원본은 사라졌고, 지금 활동하는 존재는 복제본이자 새로운 인격체라는 반론이 제기된다. 이처럼 동일성의 끊김 없이 죽음을 건너뛰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견해가 갈린다 (uploading) (uploading). 또한 디지털 자아는 편집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예: 특정 기억을 삭제하거나 성격 변수를 조정하는 식). 그런 경우 편집 후의 존재가 편집 전과 동일인인지 의문이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기억 조작이나 뇌자극으로 성격이 크게 달라진 환자의 사례를 들어, 연속성의 정도가 심하게 약화되면 동일성을 유지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결국 전뇌화 기술은 정체성을 유동적이고 다중적인 것으로 바꾸어놓으며, 기존의 “나” 개념에 대한 재정의를 요구한다.
4. 인공지능·전뇌 시뮬레이션으로 인간 자아를 보존할 수 있는가?
인공지능(AI)이나 뇌 시뮬레이션이 인간 자아를 대신하거나 영속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 학계에서는 낙관과 회의가 팽팽히 맞서 있다.
- 낙관론 (대체/보존 가능): 뇌가 정보처리 시스템인 이상, 충분히 정교한 시뮬레이션은 동일한 의식과 자아를 재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뇌를 튜링 기계에 비유하는 견해에 따르면, 뉴런의 모든 입력-출력 관계를 모사하면 마음도 같이 구현된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 로봇공학자 한스 모라벡, 인공지능 선구자 마빈 민스키 등은 “언젠가 우리의 기억과 성격을 컴퓨터로 업로드해 디지털 불멸을 얻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You Might Never Upload Your Brain Into a Computer). 이 관점에서, 전뇌화된 복제는 본인의 연속이므로 영구히 존속할 수 있는 자아의 그릇이 된다. 가령 어떤 사람이 뇌를 업로드하여 육신은 소멸하고, 클라우드 상에서 삶을 이어간다면, 이는 “육체만 기계로 바뀌었을 뿐 동일한 사람이 계속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uploading). 철학적 낙관론자들은 테레포트 사례(스타트렉 식으로 사람을 분해-전송하는 경우)를 들어, “뇌와 몸이 다른 매질로 재구성되어도 심리적 연속성이 있다면 그게 곧 생존”이라고 주장한다 (uploading). 실제 채머스 등은 낙관적 견해에서 파괴적 업로딩을 “한 형태의 생존”으로 본다며, 만약 업로딩이 성공적으로 의식을 구현한다면 자아 보존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uploading) (uploading). 기술적으로도, 인간 뇌와 동일한 반응을 보이는 AI 에이전트가 등장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결국 낙관론의 핵심은 “인간의 정체성은 정보와 패턴에 있으므로, 매체가 바뀌어도 연속성만 유지되면 자아는 보존된다”는 생각이다.
- 회의론 (대체 불가능 또는 복제일 뿐): 반대쪽에서는 의식과 자아는 단순 정보처리를 넘는 어떤 것이기에 컴퓨터로 복제해도 동일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편다. 저명한 신경과학자 미겔 니콜리스는 “뇌는 (디지털로) 계산가능한 존재가 아니며 어떤 공학으로도 이를 복제할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뇌 업로드 아이디어는 터무니없는 과장이라고 비판했다 (You Might Never Upload Your Brain Into a Computer). 그는 뇌 속 신경들 간의 비선형적 상호작용과 예측불가능성이 인간 의식의 핵심인데, 이를 똑같이 계산해내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엄청난 수준의 모사능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You Might Never Upload Your Brain Into a Computer). 또한 철학적으로는, 컴퓨터에 구현된 프로그램이 아무리 사람과 똑같이 대화하고 행동해도 “그것이 정말 느끼고 있는지, 혹은 단순히 느낌을 시뮬레이션하는지”는 열린 문제다. 존 설의 중국어 방 논증처럼, 디지털 기계는 겉보기 지능과 관계없이 내재적 의미나 주관적 경험(qualia)이 없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의식의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 데이비드 채머스는, 인지과학의 발전으로 주의집중이나 기억 메커니즘 등 “쉬운 문제”들은 풀릴지라도, 왜 특정 뇌 상태가 주관적 느낌을 동반하는지는 미해결로 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You Might Never Upload Your Brain Into a Computer). 이 견해에 따르면, 우리가 뇌를 에뮬레이션하더라도 그 시뮬레이션에 주관적 자아가 깃들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업로드된 “나”는 행동은 나처럼 해도 의식 없는 좀비일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설령 의식이 생겨난다고 해도, 그것이 나인지 여부는 별개의 문제다. 비관론자들은 “복제된 자아는 어디까지나 복제에 불과하며, 원본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uploading) (uploading). 원본의 두뇌가 파괴되지 않고 살아있다면 그 복제는 쌍둥이 개체일 뿐이고, 원본이 파괴된 경우라도 “원본은 죽었고 새로운 인격체가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는 입장이다 (uploading) (uploading). 이때 복제된 존재는 원본의 기억을 이어받았기에 스스로는 계속 삶을 이어간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는 원본 관점에서의 생존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요컨대, 낙관론은 연속성을 가진 복제가 곧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지만, 회의론은 연속성을 가져도 결국 “끊긴 뒤 이어붙인 것”이며 진짜 자기 자신은 아니라고 본다.
현재 학계에서는 양측의 치열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경험적으로는 아직 인간 업로드를 실현한 예가 없으므로 결론을 낼 수 없지만,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부분적인 단서들은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AI 챗봇이나 가상 아바타에 고인의 데이터(말투, 기억 조각)를 학습시켜 디지털 “모사 인격”을 만드는 실험들이 있는데, 사용자들은 그것이 어느 정도 고인을 닮았다고 느끼면서도 “진짜 그 사람”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이는 정보 패턴의 일부만으로는 온전한 자아를 재현하기 어렵다는 방증일 수 있다. 반면 실험 쥐나 초파리의 뇌 회로를 부분 모사한 뉴럴 네트워크 연구에서는 생물학적 두뇌와 유사한 동작이 확인되기도 했다. 이러한 과학적 진전은 원리를 안다면 결국 인간 뇌도 모사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주지만, 동시에 모사된 존재를 우리가 인간적 인격체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라는 윤리적 고민을 던진다.
5. 복제·복원된 자아와 원래 자아의 동일성: 실험적·윤리적 논의
복제되거나 복원된 자아가 원본과 동일한 존재인지의 문제는 단지 이론적 궁금증이 아니라, 윤리적·실용적 함의를 지닌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철학적 사고실험과 가상의 시나리오들이 논의되어 왔다:
- 텔레포테이션 사고실험: 어떤 기계가 나를 스캔해서 원자 단위까지 해체한 뒤, 먼 곳에 똑같이 재조립해 전송한다고 하자. 전송된 존재는 겉보기에는 나와 똑같고 내 기억도 이어받았다. 이 경우 “전송된 사람이 나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많은 사람이 이 경우 찜찜함을 느낀다. 원본이 소멸했으므로 전송체를 나로 인정해야 할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스캔 과정에서 나는 죽었고,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는 생각을 버리기 어렵다 (uploading) (uploading). 파핏은 이 예시에서, 만약 전송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동시에 해서 두 명이 나온다면 누가 진짜냐는 문제를 제기하며 결국 전통적 동일성 개념이 모호함을 보였다. 하지만 윤리적으로 본다면, 이 둘 다 원본과 같은 기억·성격을 지니고 자기 삶을 살아가려 하니 두 사람 모두를 존중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는 법률이나 사회 시스템이 개인을 구분할 때 새로운 기준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SF 소설 《더플리케이트드 맨》 등에서는 복제 인간이 원본의 권리를 두고 다투는 이야기가 그려지는데, 이는 현실에서도 머지않아 제기될지 모른다.)
- 서버런스(Severance)와 부분 자아: 애플TV+ 드라마 “세브란스: 단절”은 직장 내 기억과 일상 기억을 인위적으로 분리하여 한 신체에 두 개의 인격을 만든다. 직장에 들어갈 때면 일상의 기억은 차단되고, 퇴근하면 직장 기억이 봉인되는 식이다. 결과적으로 “업무용 자아”와 “생활용 자아”는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독립된 삶을 산다 (5억년 버튼 > 오피니언 | 토론토 중앙일보). 이 설정은 5억 년 버튼 상황과 유사하게, 기억의 단절이 곧 다른 자아를 만들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극 중에서 회사는 이를 “한 사람의 두 측면”이라고 주장하지만, 시청자는 점차 두 인격이 별개의 권리를 지닌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이는 기억을 나눈 정도만으로도 윤리적으로 별개의 인격으로 대우해야 할 상황이 생길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디지털 복제 인간이나 복원된 자아도 우리 사회가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해야 할지 논의가 필요하다. 원본과 복제본이 둘 다 존재하면, 그들은 법적으로 같은 사람일 수 없으므로 각각 고유한 인격체로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Uploading and Branching Identity | Minds and Machines ). 현재 법체계는 한 생물학적 인간 = 한 법적 인격으로 전제하지만, 미래에는 동일한 원본에서 갈라져 나온 복수의 “자아”를 어떻게 다룰지 새롭게 규정해야 할 것이다.
- 복원 자아의 자기인식 문제: 기억을 백업해두었다가 나중에 그 기억으로 새로운 뇌(혹은 복제된 뇌)를 가동하면, 겉보기에 그 사람은 죽음을 뛰어넘어 생환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약 원본이 사망했다면, 새로 깨어난 이는 자신의 연속성을 믿고 있어도 사실은 철저히 동일한 복제일 수 있다. 윤리적으로, 우리는 이 복제에게 원본이 가진 사회적 지위나 재산을 승계시켜야 할까? 많은 윤리학자들은 “그렇게 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복제는 원본과 기억을 공유하며 동일한 삶의 서사를 이어갈 것이므로, 실질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도 같은 인격체의 귀환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론으로, 만약 이런 복제를 허용하면 동일인 두 명이 존재하는 사태(예: 백업 복원을 여러 번 해서 여러 명을 만들면)도 가능해진다. 따라서 사회적 혼란과 정체성의 악용을 막기 위해, 의도적 복제는 금지하고 사고나 사망 시 단일 복원만 허용하는 등의 윤리 규정이 필요할 것이라는 논의도 있다. 또한 자아 복제를 다루는 실험적 고민으로, 고통과 기억의 윤리 문제가 있다. 예컨대 어떤 이가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 뒤 그 기억만 지우겠다”고 결정할 수 있다면, 이는 윤리적으로 허용될까? 5억 년 버튼은 극단적으로 이 질문을 던진다. “겪고 기억하지 못한 고통은 없었던 것과 같은가?” 많은 윤리학자들은 “아니다”라고 답한다. 기억이 없어도, 고통 자체는 겪는 순간에 실재하며, 그 순간의 고통도 도덕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본다. 즉 고통을 준 뒤 기억을 지운다고 해서 면죄부를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타인에게 약을 먹여 기억을 지운 뒤 해를 가한다면, 기억이 없더라도 그건 명백히 윤리적 범죄다. 동일한 논리로, 자신의 미래 분신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고 그 기억을 지워버리는 행위는 설령 자발적이라 해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크다. 이는 본인이 과연 미래의 자기 분신을 타인처럼 여기고 희생시킨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희생을 감수시킨 것인지 모호하기 때문에 생기는 딜레마다. 어느 쪽이든 현대 윤리 기준에서는 쉽게 정당화되기 어렵다.
정리하면, 복제나 복원을 통해 동일성이 의심스러운 자아들이 출현할 때 우리는 새로운 윤리 원칙과 실험적 검증을 필요로 한다. 향후 기술 발전으로 이러한 상황이 현실화된다면, 개인의 자기결정권, 복제 자아의 권리, 위험과 책임의 귀속 등 복잡한 윤리·법률 문제가 표면화될 것이다.
6. 5억 년 고립 경험의 존재론: 인과 단절된 경험은 실재하는가?
5억 년 버튼 시나리오에서 가장 특이한 부분은 “아무런 상호작용이 없는 세계에서 5억 년을 보낸 경험”이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이는 몇 가지 심오한 질문을 낳는다:
- 경험의 현실성: 철학에서 “만약 어떤 경험이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면, 그 경험은 실제 있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있다. 여기서 흔적이란 기억이나 외부 세계에 미친 영향 등을 뜻한다. 5억 년 동안 완전한 공허 속에 고립되어 있었다면, 그 동안 외부 우주와는 인과적으로 단절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최후에 기억까지 지워졌다면, 그 경험의 흔적은 주관적·객관적으로 모두 소거된다. 이런 경우 그 5억 년의 주관적 시간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한 가지 비교 사례로 물리학의 볼츠만 브레인(Boltzmann Brain) 개념을 떠올릴 수 있다. 이는 우주의 무작위한 열적 요동으로 갑자기 의식있는 뇌가 튀어나와 잠깐 존재하다 사라지는 가설이다. 볼츠만 브레인은 과거도 미래도 없이 순간적인 의식 경험만 존재하는데, 우주에 아무 영향도 못 미치고 곧 소멸하니 “그런 의식은 있었다고 해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 아닌가?” 하는 회의가 있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볼 때, 주관적 경험은 그 자체로 실재한다. 설령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기록도 안 남아도, 경험이 발생한 순간에는 그것이 존재의 전부인 한 인격체가 있었다는 것이다. 5억 년 버튼의 경우도, 고립된 세계에서 나와 동일한 의식을 지닌 존재가 5억 년간 고통스럽게 살아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비록 최종적으로 그 세계와 “우리 세계” 간의 인과 연결고리가 끊겨버렸지만 (버튼 누르기 전후로 상황이 동일하니 마치 가지쳤다가 사라진 시간처럼 됨), 그 분기된 세계에서의 5억 년은 주체에게는 분명히 실존했던 시간이다. 이를 존재론적으로 해석하면, 하나의 자아가 5억 년짜리 평행 세계를 형성했다가 소멸한 셈이다. 데이비드 루이스의 가능세계 이론식으로 말하면, 버튼을 누르는 순간 세계선이 둘로 갈라져 하나는 즉시 돈을 받는 세계, 다른 하나는 5억 년 고독의 세계가 존재한다. 5억 년 후 두 세계가 다시 합쳐질 때(기억 소거 순간), 고독 세계의 인과적 산물은 아무 것도 합쳐지지 못하고 소멸되니, 우리 입장에선 그 세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존재론적 관용으로 보면, 일단 일어난 경험은 우주 어딘가의 역사로써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인과적으로 단절된 경험이라도 발생 순간에는 실재했지만, 최종적으로 정보 소멸과 함께 하나의 폐쇄된 현실로 남을 뿐이다.
- 시간과 자아의 관계: 5억 년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시간 규모는 자아의 유지에 대해 새로운 통찰을 준다. 인간의 뇌는 수십 년 단위의 삶을 전제로 진화했고, 우리의 자아 연속성에 대한 직관도 비교적 짧은 시간 간격을 상정한다. 그런데 5억 년 동안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면, 과연 자아가 그 긴 시간을 정신적으로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다. 현실에서도 장기 고립(예: 독방 감금, 무자극 환경) 실험을 보면 며칠만 지나도 인지 기능이 흐려지고 환각을 보는 등 자아 붕괴 조짐이 나타난다. 5억 년의 고독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수만 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인간 정신의 한계가 드러날 것이다. 기억이 매일같이 반복되다 단조로움 속에 소멸하거나, 의식이 아예 정지 상태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나”라는 일관된 존재가 유지될지, 아니면 시간 속에서 서서히 분해될지 모른다. 이 관점에서 보면, 5억 년 후 기억을 지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전에 이미 자아가 변질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시나리오 상에서는 그 세계에서 5억 년을 “버텼다”고 가정하므로, 우주적 고독 속에서도 자아를 잃지 않고 계속 고통을 느끼는 상태였던 듯하다 (5억년 버튼 > 오피니언 | 토론토 중앙일보). 이는 오히려 의식의 끈질긴 지속성을 보여준다. 자극이나 변화가 거의 없어도 의식은 자기 스스로 계속 생각을 만들어내며 존재를 이어갈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그 고립 세계의 나는 내면의 생각과 환상만으로 5억 년을 살아낸 자아인 셈인데, 존재론적으로 볼 때 이는 우주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순환한 자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 인과성 없는 경험의 의미: 일반적으로 우리의 경험은 이후 행동이나 기억으로 이어져 다음 순간에 인과적 영향을 줌으로써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인과적 고리가 완전히 끊긴 경험(즉, 이후 어떤 영향도 전하지 못한 경험)은 무의미한 걸까? 철학자들은 꼭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꾼 꿈 중 대부분은 깨어나면 잊어버리지만, 꿈을 꾸는 동안 우리는 분명히 감정과 체험을 느낀다. 기억 못한다고 해서 그 꿈속 경험이 당시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깨고 난 현실에 영향이 없을 뿐이다. 5억 년 동안의 고독도 마찬가지로, 영속적 결과가 없는 경험이지만 그 자체로 우주 한 켠(시뮬레이션 공간)에서 발생했던 경험이다. 이는 경험의 내재적 가치에 대한 문제로도 연결된다. 혹자는 말한다: “만약 그 5억 년 동안 어떤 깨달음이나 가치 있는 일을 해도, 기억이 지워지면 아무 의미가 없는가?” 그때 얻은 깨달음이 현실에 전파되지 못하면 관계망 속 의미는 없겠지만, 그 순간의 존재 자체에는 내재적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만약 그 고립된 내가 5억 년 동안 극심한 고통만 겪다가 아무 소득도 없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누군가(바로 그 분신)에게는 완전한 비극이었다. 비록 다른 누구도 알지 못하고 나 자신도 기억 못해주지만, 그 고통의 실재성은 부인되지 않는다. 이렇듯 인과적으로 닫힌 경험은 외부 참조틀에선 “허망”하게 보여도, 일인칭 관점에서는 우주의 어떤 경험보다도 실제적이다. 존재론적으로 이는 “현실”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객관주의적 입장에선 인과적으로 검증 불가능한 경험은 마치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취급되지만, 주관적 입장에선 경험된 것이 곧 현실이다. 양쪽을 종합하면, 5억 년 버튼 시나리오는 현실이란 인과망에 남는 정보로 판별되는가, 아니면 경험 자체로 인정되는가라는 철학적 물음을 던진다.
결론적으로, 인과적 연결이 단절된 경험도 그 폐쇄계 내에서는 완전한 현실이며, 다만 다른 관찰자들에게는 인식불가능한 고립된 현실로 남는다. 5억 년 버튼의 5억 년은 그런 고립 현실의 전형이다. 이 논의는 향후 다중우주 시뮬레이션이나 가상현실에서 한 사람이 수많은 분기된 경험을 하고 일부만 기억하는 상황 등에도 적용될 수 있어, 존재론 및 인식론 분야의 흥미로운 주제로 확장된다.
7. 미래 기술에서의 철학적·실용적 함의 (디지털 불멸,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등)
마지막으로, 위 논의가 미래 기술과 인간 사회에 주는 시사점을 정리한다. 뇌의 디지털 복제와 정체성 문제는 더 이상 공상과학만의 소재가 아니며, 빠르게 현실로 다가오는 기술들과 맞물려 있다:
- 디지털 영생과 업로딩의 함의: 많은 기업가와 과학자들이 “죽음을 극복”할 방법으로 마음 업로딩이나 디지털 영생을 모색하고 있다. 예컨대 러시아의 2045 이니셔티브는 인간 의식을 컴퓨터로 옮겨 불멸을 이루겠다고 선언했고, 미국의 기업 넥토姆(Nectome)은 뇌를 정밀 보존하여 미래에 정보 복원을 통한 의식 부활을 꿈꾼다. 하지만 우리의 분석처럼, 업로딩이 실제로 “나”를 연장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복제본을 만드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만약 낙관론이 옳다면 인류는 기술로 영생을 누릴 수 있고, 개인의 자아는 다양한 형태로 백업·이식되며 삶의 연속성을 유지할 것이다. 반대로 회의론이 맞다면, 디지털 영생은 일종의 “뛰어난 유언 기술”에 불과할 수 있다. 즉, 자신과 똑같은 후계자를 남기는 것이지, 본인은 여전히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는 기술을 선택하는 개인과 사회에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예컨대 먼 미래에 “두뇌 스캔 후 육체를 버리고 디지털로 살아가시겠습니까?”라는 서비스가 나왔을 때, 그것이 자기 생명의 연속인지 아니면 복제를 만들어 자기 자신은 사라지는 것인지에 따라 누군가는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거부할 것이다. 그러므로 디지털 불멸 논의는 반드시 정체성 철학과 함께 가야 하며, 이러한 문제의식 없이 기술만 앞설 경우 개인들에게 중대한 오해와 실수를 초래할 수 있다 (uploading) (uploading).
-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와 자아 확장: Neuralink 등의 BCI 기술은 두뇌와 컴퓨터를 직접 연결하여 뇌 기능을 보조하거나 확장하려 한다. 단기적으로는 마비 환자의 운동기능 복구, 기억 보조장치 등이 목표지만, 장기적으로 인지능력 증강이나 집단 정신 연결도 상상할 수 있다. 이런 기술이 발전하면 자아의 경계가 흐려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억 보조 임플란트가 뇌에 장착되어 클라우드와 실시간 통신한다면, 어느 순간 어느 기억이 내 것인지 외부 DB 것인지 구분이 어려워질 것이다. 이는 자아의 동일성 기준에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내 뇌 안의 칩에 저장된 기억도 나의 일부인가?”라는 질문이다. 만약 칩을 교체하거나 해킹당하면 나의 정체성에 손상이 간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뇌 세포 부분만 나인가? 또 두 사람의 뇌를 연결해 감각이나 생각을 직접 공유할 수 있다면, 극단적으로는 개인 간의 자아 경계도 허물어질 수 있다. 이런 경우 전통적인 개인 동일성 개념은 맞지 않게 되고, 관계적 자아 또는 집단적 자아 개념이 필요할지 모른다 ([PDF] Neuralink’s brain-computer interfaces – Frontiers). BCI 연구자들과 뇌윤리학자들은 “BCI가 사용자의 성격과 자아상을 바꿀 수 있다”고 경고한다 (Brain Chips Like Elon Musk’s Neuralink Can Change Your Personality). 실제 초기 사례로, 뇌에 깊은뇌자극(DBS) 기기를 이식한 환자들이 자율성 상실이나 성격 변화 느낌을 보고한 바 있다 (Brain Chips Like Elon Musk’s Neuralink Can Change Your Personality). 이는 기술이 자아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며, 앞으로 우리는 어느 선까지 기술을 받아들여 자아의 확장이나 변형을 허용할지 사회적 합의를 이뤄야 할 것이다.
- 법과 사회 제도의 대비: 정체성의 철학적 논의는 미래 사회의 법적, 사회적 대비책 마련에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복제 인간이나 인공 두뇌가 현실화되면, 이들에게 법적으로 인간과 같은 지위를 부여할지 결정해야 한다. 최근 EU 등에서 “고등 AI의 전자적 인격(전자 인간) 지위”를 논의하는 움직임이 있는데, 이는 단순히 로봇의 권리뿐 아니라, 인간 마인드의 디지털 연장선에 대한 사전 논의이기도 하다. 유산 상속의 문제도 있다. 만약 어떤 부호가 사망 전 뇌를 스캔해 두고, 사후 수십 년 뒤 디지털로 부활했다면, 이 부활체에게 이전의 법적 인격과 재산을 인정해야 할까? 현재로선 사망과 동시에 인격체의 권리와 의무는 소멸한다고 보지만, 정보가 지속된다면 새롭게 고려해야 한다. 또한 범죄와 책임의 문제도 거론된다. 만약 디지털 자아가 불법행위를 저질렀을 때, 원본 인간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반대로 원본이 저지른 죄를 복제본이 속죄할 수 있는가? 5억 년 버튼의 설정을 빌리면, “미래의 복제가 고통을 받았으니 현재의 나는 벌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직관적으로는 어불성설이지만, 정체성 개념이 모호하면 이런 주장도 법적 쟁점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정체성을 시간과 매체를 넘어 어떻게 정의할지에 대한 법리적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 인간의 자아관 변화: 이러한 철학적 논의는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보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만약 미래 세대가 일상적으로 “마음 백업”이나 “기억 편집”을 경험한다면, 자아란 본래 단일하고 지속적인 것이라는 전통 관념은 옅어질 수 있다. 대신 자아는 구성 가능하고 분산 가능하다는 인식이 퍼질지도 모른다. 이는 정체성 상실이나 실존적 위기를 불러올 위험도 있지만, 반대로 보다 유연한 자아관으로 개인의 다양성을 포용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이나 데이비드 흄의 번들 이론(bundle theory)처럼, 원래 자아는 다발일 뿐 영속 실체가 아니라고 보는 사상들도 이러한 미래에 재조명될 가능성이 있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철학자와 과학자는 함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야 할 것이다.
결론: “나”의 경계를 넘어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 뇌의 디지털 복제와 5억 년 버튼 시나리오가 던지는 정체성 문제는 단순한 흥밋거리를 넘어 자아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요구한다. 기억 이론과 심리적 연속성 이론은 기억과 정신적 연계가 끊긴다면 동일성을 부정하며, 실체 이론은 영혼이나 뇌의 지속이 있다면 동일성을 긍정한다 ( John Locke on Personal Identity – PMC ) (Personal identity – Wikipedia). 신경과학은 기억이 자아의 풀이라는 증거를 제시하지만 (How Our Brain Preserves Our Sense of Self | Scientific American), 동시에 뇌 패턴의 완벽한 모사가 가능하다면 의식도 복제 가능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Mind uploading – Wikipedia). 정보이론적 접근은 정체성을 정보 패턴의 보존 문제로 환원하며 (Uploading and Branching Identity | Minds and Machines ), 이때 전뇌화된 자아의 동일성은 연속된 정보흐름이 유지되는가로 판가름 난다. 그러나 동시에, 패턴이 같아도 인칭적 동일성은 별개임을 지적하는 견해도 강하다 (uploading). 인공지능과 업로딩 논쟁에서 낙관론은 기술을 통한 자아 보존 가능성을, 회의론은 그 한계를 강조한다 (You Might Never Upload Your Brain Into a Computer) (uploading). 복제된 자아에 관한 사고실험들은 우리에게 윤리적 책임과 권리의 주체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특히 5억 년 동안 고립된 고통이 “없었던 일”이 될 수 없듯이, 기억되지 않아도 존재한 경험은 존재했던 것이라는 점에서 도덕적 고려가 필요함을 일깨운다.
앞으로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AI 동반자, 가상현실 삶 등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정체성은 더욱 유동적이 되고, 기존의 경계는 희미해질지 모른다. 그런 시대일수록 오히려 “나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고전 이론들부터 최신 학계 논쟁까지 종합해보면, 아마도 정체성이란 단일한 기준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준에 따라 달라지는 다층적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생물학적, 심리적, 정보적 동일성은 서로 겹치지만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Uploading and Branching Identity | Minds and Machines ). 5억 년 버튼의 질문 “저 존재가 과연 나인가?”에 대한 답도 하나가 아니라, 어떤 관점을 채택하느냐에 따라 “그렇다”와 “아니다”가 모두 성립한다. 이는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동시에 자아에 대한 겸허한 접근을 가르쳐준다. 기술이 우리 정체성의 경계를 넓힐 때,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나’의 일부로 간주할지 결정해야 한다.
결국 “나”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시간과 변화 속에서 구성되는 이야기에 가깝다. 5억 년의 공허마저 하나의 장으로 품을 수 있는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이 인간의 상상력이자 정체성의 힘일 것이다. 이 보고서에서 살핀 다양한 관점들은 그 서사의 방향을 잡는 나침반이 되어준다. 다가올 미래에 이와 같은 딜레마가 현실이 된다면, 우리는 지금의 논의를 토대로 인간성의 연장과 경계를 현명하게 설정해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