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주는 빅뱅으로 무(無)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배우면, 곧바로 “에너지는 생기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데, 그럼 이건 보존법칙에 어긋나지 않나?” 하는 의문이 생김.
물질과 복사(빛)가 잔뜩 있는 현재 우주가 ‘아무것도 없던 상태’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니, 에너지 보존과 모순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듬.
하지만 현대 우주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빅뱅 이론이 열역학 제1법칙(에너지는 형태만 바뀔 뿐, 새로 만들어지거나 사라지지 않음)과 직접 충돌하지 않는다고 함.
1. 우주의 총에너지가 0일 수도 있다는 관점
빅뱅 이전에 ‘진짜 무(無)’였다고 가정해도, 우주 전체 에너지가 +와 -를 합쳐 0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시됨.
- 일반적으로 물질이나 복사는 양(+)의 에너지를 가진다고 봄.
- 중력 퍼텐셜 에너지는 음(-)의 값을 가진다고 봄.
- 둘을 합치면 전체가 0이 될 수 있다는 이론이 있음.
이 관점에서는 “처음부터 에너지가 0이었으니, 갑자기 뭔가가 ‘새로 생긴 것’이 아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음.
1970년대부터 양자 요동(quantum fluctuation)을 통해 우주가 무(無)에서 ‘자동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아이디어도 제시되어 왔음.
예를 들어,
- ‘빚’과 ‘현금’의 상쇄 비유:
지갑에 +1만 원이 들어 있는데, 동시에 -1만 원의 빚이 있다면, 합쳐서 0원이 됨. 즉 실제 현금이나 빚이 있지만, 둘을 합하면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음.
우주도 이와 비슷하게, **‘+에너지(물질·복사)’**와 **‘-에너지(중력 퍼텐셜)’**가 있는 상태이되 그 합이 0일 수 있다는 것임. - 풍선 안의 공기와 외부 압력:
풍선 내부의 공기압(+)과 풍선을 누르는 외부 압력(-)이 균형을 이뤄서, 결국 순압력이 0이 될 수도 있음. 우주도 전체적으로 보면 긍정적·부정적 에너지 성분이 서로 균형을 이뤄 실제로는 0일 수 있다는 식으로 비유할 수 있음.
2. 일반 상대성이론에서 우주 에너지를 정의하기 어려운 이유
열역학 제1법칙은 주로 “시공간이 고정된 실험실 환경”에서 적용하기 쉬움.
그러나 우주는 시공간 자체가 팽창·휘어지고 있음.
- 시간에 대한 대칭성(노터 정리에서 에너지 보존의 근거)이 단순히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우주 전체 에너지가 얼마인지 딱 잘라 말하기 복잡함.
- 일반 상대성이론에서는 “우주가 팽창하거나 휘어질 때, 에너지를 어떻게 측정할지”가 일상적 기준과 달라짐.
- 결과적으로 “에너지가 보존된다”는 말 자체가 우주 전체 스케일에서는 우리가 아는 단순한 형태가 아니게 됨.
예를 들어,
- 롤러코스터 트랙 자체가 움직이는 상황:
평소엔 롤러코스터가 달리는 ‘고정된 트랙’ 위에서 “속력과 위치 변화에 따른 에너지를 계산”함. 트랙이 고정되어 있으면 에너지를 쉽게 측정할 수 있음.
그런데 만약 트랙 자체가 늘어나거나 구부러지면, 롤러코스터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움직였는지를 측정하기도 훨씬 복잡해짐.
우주의 팽창도 이와 비슷함. - 탁자 위 실험 vs. 우주 전체:
탁자 위에서 스프링이나 공을 놓고 돌리면, 외부로부터 간섭이 거의 없으니 “계(系)가 고립”되어 있다고 봄. 이때 스프링-공 계의 에너지가 보존되는지 확인하기 쉬움.
반면 우주 전체는 경계나 외부가 없고(우주 바깥은 우리가 알 수 없음), 시공간 자체가 움직이므로, 에너지를 똑같이 세기가 어려움.
3. 빅뱅 이전(특이점)은 아직 미지의 영역
빅뱅 이론은 “아주 작은 시점(플랑크 시간 ≈10−43\approx 10^{-43}초) 이후부터”를 비교적 잘 설명함. 하지만 그 이전(특이점)이나 t=0 시점은 현존 물리학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음.
- 일반 상대성이론 방정식을 특이점에 그대로 적용하면 무한대가 튀어나오고, 수학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의미를 잃어버림.
- 양자역학과 중력을 통합한 ‘양자 중력 이론’이 완성되어야만, 특이점 너머나 빅뱅 이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짐.
- 따라서 “에너지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실제로 ‘무’ 상태가 있었는지” 등은 아직 확실히 답변되지 않은 상태임.
예를 들어,
- 소설책을 1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하는 상황:
소설책 1페이지에 이미 이야기가 시작되어 있고, 그 이전에 작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책에 안 적혀 있음.
빅뱅 이론도 마찬가지로, “아주 작은 시점 이후”부터의 우주는 데이터를 통해 연구가 가능하지만, 그 이전(빅뱅 특이점)은 ‘책에 쓰이지 않은 영역’ 같은 것임. - 영화의 본편만 보고, 제작 과정은 모르는 비유:
영화를 볼 때, 스토리가 시작된 지점부터 끝까지는 알 수 있지만, 감독이 시나리오를 어떻게 구상했고 편집을 어떻게 했는지는 직접 보여주지 않음.
빅뱅도 ‘재료가 어디서 왔는지’는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임.
4. 우주 팽창은 새로운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이 아님
빅뱅 이후 우주는 계속 팽창 중이지만, 이것이 “계속해서 무한한 에너지를 생성한다”는 뜻은 아님.
- 빛(복사)은 우주 팽창에 따라 파장이 길어지면서(적색편이) 에너지가 감소함.
- 물질과 복사의 에너지는 팽창으로 인해 밀도가 줄어들기도 함.
- 암흑에너지(우주상수)가 우주 팽창을 가속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이것을 “새 에너지가 마구 생겨나는 것”으로 단정하기엔 일반 상대성이론의 시공간 팽창 개념과 긴밀히 연결된 부분임.
- 결과적으로 “열역학 제1법칙을 어기고 있다”기보다는, 우주 전체 규모에서는 중력과 시공간의 휘어짐을 고려해보면 일상적 기준과 다른 방식으로 에너지가 재분배된다고 볼 수 있음.
예를 들어,
- 풍선에 그려진 그림:
풍선 표면에 작은 그림을 그려놓고 바람을 불면, 그림이 점점 커짐. 그런데 ‘그림의 선이 늘어나고 희미해지는 것’이지, 완전히 새로운 그림이 계속해서 생성되는 게 아님.
우주의 팽창도 이와 유사하게 “공간의 확장”으로 인해 에너지 밀도나 파장 등 여러 물리량이 달라짐. - 물속에 먹물 풀기:
컵에 든 물에 먹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고 할 때, 처음에는 진한 부분이 작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물 전체로 퍼지면서 옅어짐.
이때 “먹물이 새로 생기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있던 먹물이 공간에 고루 퍼지면서 농도가 변하는 것임. 우주 팽창과 에너지도 비슷하게 ‘분산’ 또는 ‘변환’될 뿐, 갑자기 ‘무한 생성’되는 건 아님.
결론
- 우주의 전체 에너지가 0일 가능성(양+과 음-이 상쇄)
- 시공간 팽창으로 인해 우주적 스케일의 에너지 보존 개념이 복잡함
- 빅뱅 이전(특이점)은 아직 완벽히 알 수 없는 미지 영역
- 팽창은 새로운 에너지를 무한히 만드는 게 아니라 에너지 형태·분포가 변하는 과정
이 네 가지를 고려하면, 빅뱅 이론이 열역학 제1법칙과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음.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양자 중력, 빅뱅 이전의 상태 등)도 많지만, 현재 과학으로 확인된 한도 내에서는
“우주가 아무런 법칙도 없이 막 생겨난 것”이라기보다, 특유의 방식으로 보존법칙을 충족하면서
팽창해 왔다고 보는 것이 현대 우주론의 일반적인 입장이 됨.